홍무 30년 청곡사명 청동은입사향완 – 조선시대 불교 공예의 정수
고려의 문화를 계승하고 조선의 기틀을 세우던 시기, 한 점의 공예품이 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불을 담는 향로가 아니라, 새로운 왕조의 정신을 담은 상징이었습니다. 바로 ‘홍무 30년 청곡사명 청동은입사향완’입니다.
이 향완은 조선 초기, 정확히는 1397년에 제작된 것으로, 조선시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청동은입사향완입니다. 높이 39cm의 이 향완은 통일신라와 고려의 불교 조각 전통을 잇고 있으며, 특히 은입사 기법과 범자의 표현에서 예술성과 종교적 상징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되었다는 명문은 이 향완의 역사적 무게를 더합니다. 본 글에서는 이 유물의 기형과 장식, 시대적 배경과 정치적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려 합니다.
1. 청동은입사향완의 구조와 조형미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향완의 형태
이 향완은 받침, 간주, 노신의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받침은 3단이며, 상단에는 연화당초문, 중단에는 뇌문, 하단에는 무문 외반부가 위치합니다. 간주는 나팔형으로, 하단엔 연판문, 상단엔 여의두문을 은입사로 표현하였고, 노신 아래 2단의 원륭대는 각각 뇌문과 연판문으로 장식되었습니다. 전체 구조는 안정적이면서도 화려한 문양을 품고 있어 시각적으로도 조화롭습니다.
정교한 문양과 은입사의 조화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은입사 기법입니다. 유운문, 앙련의 연판문대, 연화당초문이 정교하게 새겨졌으며, 이는 단지 장식을 위한 요소가 아니라, 불교의 세계관과 미적 가치를 함께 담아내고자 한 결과입니다. 문양 하나하나에 담긴 상징성은 당시 장인의 수준 높은 기술과 더불어 불교 신앙의 깊이를 엿보게 합니다.
범자의 상징성과 독창성
이 향완의 핵심은 범자입니다. 중심에 여의두문을 배치하고, 그 안에 다시 원을 그려 ‘aṃ, hmaṃ, dme, ya, tgi, ma’라는 여섯 글자의 범자를 정밀하게 은입사했습니다. 조선시대 향완 중 이렇게 여섯 자의 범자를 새긴 예는 이 향완이 유일합니다. 고려시대에는 일반적으로 네 자만을 새겼기에, 이는 예외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시도였습니다. 범자는 단순한 글자가 아닌, 불교의 진언과 같기에 그 조형은 신성 그 자체였습니다.
2. 제작 시기와 정치적 배경
조선 건국기와 신덕왕후의 명복
이 향완은 명문에 따르면 ‘대명 홍무 30년 정축(1397) 조선국 개국조 성조 중궁 신덕왕후’를 위한 향로로 제작되었습니다.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정비로,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이 향완은 그녀의 명복을 비는 의식용 도구이자, 조선 왕조의 시작을 상징하는 공예품입니다. 단순한 사찰 용구를 넘어 국가적 성격의 불교미술품이라 할 수 있지요.
청곡사의 위상과 중창비구 상총
향완이 봉헌된 청곡사는 진양대도호부에 위치한 비보선찰로, 당시 지역 불교의 중심지였습니다. 명문에 나오는 ‘중창비구 상총’은 송광사 주지였고, 이후 흥천사의 감주로 활동하며 선풍 부흥을 이끈 고승입니다. 그가 향완 제작을 주관했다는 것은 이 유물이 단지 지역 유물이 아닌, 당시 불교 중심 세력과 연결된 사찰 공예임을 의미합니다.
제작 후원자들의 정치적 배경
명문에는 또 다른 인물로 가락부원군 김사행, 찬성 김진 등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모두 태조 이성계 집권기에 왕실과 밀접한 인물들이며, 향완 제작에 있어 정치적 후원과 정당성을 뒷받침합니다. 향완은 곧 신덕왕후를 위한 정치적 추모이며, 불교적 형식을 빌린 왕조의 기념물이기도 했습니다.
3. 예술성과 전통 계승
고려 향완과의 기형적 유사성
홍무 30년 향완은 기형상으로는 14세기 고려 청동은입사향완과 거의 동일한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간주와 노신의 연판문 구성, 연화당초문과 범자 배치 등은 고려 말 제작된 향완들과 유사합니다. 이는 조선 건국 이후에도 고려 공예의 전통이 유지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은입사 기술의 정점
은입사 기법은 철이나 동 위에 홈을 파고, 은실을 박아 무늬를 만드는 고난이도 장식 기술입니다. 이 향완은 은입사의 정밀도, 배열의 안정성, 조형의 정교함에서 기술적으로 최고 수준에 속합니다. 장인의 손길이 닿은 문양은 오늘날 보아도 섬세하며, 조형미와 기능성을 동시에 구현한 결과물입니다.
조선 불교미술의 출발점
이 향완은 단순한 향로가 아니라, 조선시대 불교 미술의 출발을 알리는 상징입니다. 고려의 예술을 계승하면서도 조선 왕조의 정치적 의지를 담아낸 이 유물은 이후 수많은 향완 제작의 기준이 되었으며, 은입사 범자의 구성이 이어지는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그 점에서 조선 불교 공예의 기준작으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한 점의 향로, 천 년의 의미
홍무 30년 청곡사명 청동은입사향완은 단지 향을 담는 용기를 넘어, 조선 건국기의 정치, 예술, 종교가 한데 어우러진 종합 예술품입니다. 신덕왕후를 위한 공양이라는 목적 아래, 고려 공예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조선 왕조의 정체성을 담고 있습니다. 은입사 범자와 정교한 문양, 명문 속 인물들이 전하는 역사적 메시지는 그 어떤 유물보다 생생합니다.
이 향완을 통해 우리는 단순한 조형을 넘어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과 사상, 그리고 국가의 정체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조선의 출발점에서 피어난 향과도 같은 유산입니다.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이 향완은 600년 전의 불심과 국가의 기억을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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