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설계도, 훈민정음 해례본의 위대함
훈민정음 해례본은 단순한 책이 아니다. 이것은 문자 창제의 목적, 구조, 사용법을 모두 기록한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세종 28년(1446년), 백성을 위해 새로운 문자를 만든다는 숭고한 뜻에서 훈민정음이 반포되었고, 그 원리와 체계를 정리한 것이 바로 해례본이다. 간략한 서문인 ‘예의’와 학자들이 정리한 ‘해례’로 구성된 이 책은 한글이 단순한 문자 체계가 아닌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체계임을 보여준다. 해례본은 1940년 간송 전형필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며, 일제강점기 언어말살 정책에 대항하는 문화적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훈민정음은 단순히 문자를 만드는 기술적 작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백성을 향한 깊은 애정에서 비롯된 결정이자, 언어를 통해 사회적 평등을 이루고자 했던 지적·정치적 혁명이었다. 세종의 한글 창제는 단순한 개혁이 아닌, 조선이라는 나라의 문화적 독립 선언이었으며, 이는 이후 민족 정체성의 근간이 되었다.
해례본은 그 정신을 가장 명확하게 담고 있는 기록물이며, 오늘날 우리가 한글을 사용하는 일상 속에도 그 위대한 철학이 살아 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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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설계도, 훈민정음 해례본의 위대함 |
훈민정음 창제의 철학과 구조
백성을 위한 문자, 예의의 정신
훈민정음 서문에 담긴 핵심은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라는 대목이다. 이는 기존 한자로는 백성이 자기 말을 표현할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한 세종의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닌, 민족의 자존심이며 사고방식과 세계관의 표현이다. 세종은 민본주의 정신에 따라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문자 창제를 결심했고, 이는 문자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왕이 주도한 문자 창제’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인체를 닮은 자음과 모음의 원리
해례본에는 한글 자음과 모음의 창제 원리가 체계적으로 담겨 있다.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고, 모음은 하늘ㆍ땅ㆍ사람을 상징하는 철학적 원리에서 출발한다.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습을, ㅁ은 입을 다문 모양을 본뜬 것이다. ㆍ, ㅡ, ㅣ는 각각 하늘, 땅, 사람을 의미하며, 음양오행의 사상까지 녹아 있다. 단순한 음성기호가 아닌 철학과 과학이 결합된 언어 설계도라 할 수 있다.
해례본의 역사적 발견과 간송의 집념
사라졌던 원본, 기적처럼 되살아나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오랫동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유실된 기록이었다. 『세종실록』이나 『월인석보』에 일부 언급은 있었지만, 창제 원리 전체가 담긴 원본은 전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40년대, 간송 전형필 선생이 해례본을 입수하게 된다. 이는 일제가 우리말과 글을 탄압하던 시기였고, 해례본의 존재는 조선의 문자 창제 신화를 뒤흔드는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간송은 그 위험 속에서도 해례본을 보존했고, 해방 후 학계에 이를 공개하며 훈민정음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일제의 말살정책에 맞선 문화적 저항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가 한글 연구를 탄압하던 대표적 사례다. 이윤재, 한징 등이 투옥되고 일부는 옥사에 이르기까지 했다. 일제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언해본이 위작이라 주장했다. 왜냐하면 해례본이 존재한다면 세종의 문자 창제가 실체 있는 과학적 사실로 증명되기 때문이다. 간송의 집념은 그런 시절에 조선의 문화 정체성을 지키려는 행위였고, 그가 해례본을 입수하고 지켜낸 것은 단순한 수집을 넘어 저항의 역사로 기록된다.
훈민정음의 인류사적 의미
문자 창제의 유일한 설계서
세계 대부분의 문자는 자연 발생적이거나 기존 문자를 변형한 형태다. 하지만 훈민정음은 창제자, 창제 연도, 목적, 사용법, 철학까지 모두 기록된 유일한 문자다. 해례본은 자음과 모음의 음가를 설명하고, 초성ㆍ중성ㆍ종성 결합 원리까지 상세히 담고 있어, 문자 구조를 설계도처럼 남긴 최초의 문헌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단지 한국어의 문자라는 수준을 넘어, 인류 문명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인식된다.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기록유산
훈민정음 해례본은 그 문화적 가치와 역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는 한글이 단지 한국인의 문자체계를 넘어 전 인류가 주목해야 할 언어문화유산이라는 의미다. 특히 언어를 통한 인간 중심의 철학, 교육적 평등, 지식 보편화의 가치를 담고 있어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로 평가된다. 훈민정음은 단지 글자가 아니라 사람을 위한 도구였고, 해례본은 그 도구가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되었는지를 증명하는 기록이다.
해례본, 잊어선 안 될 우리의 정신
훈민정음 해례본은 단순한 고서가 아니다. 그것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백성을 위해 설계한 언어 체계의 청사진이자, 언어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는 철학적 시도였다. 그 안에는 과학, 철학, 교육, 정치, 문화가 통합된 조선 지성의 결정체가 담겨 있다.
해례본이 없다면 한글은 단순한 표음문자로 여겨졌을 수 있다. 하지만 해례본의 존재는 한글이 세계 최초로 문자 창제 원리를 기록한 언어이며, 민족의 삶과 정신을 담은 도구임을 입증한다. 일제강점기의 억압 속에서도 이를 지키고 보존한 간송 전형필의 노력은 한 개인의 수집을 넘어 문화적 항쟁이자 시대적 저항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자유롭게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언어는 민족의 혼이며, 그 혼의 뿌리를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해례본이다. 이제는 그 정신을 계승해 언어를 올바르게 사용하고, 세계 속의 한글 가치를 더 널리 알리는 것이 우리 세대의 과제일 것이다.
우리는 이제 과거를 기억하는 것을 넘어, 그 유산을 어떻게 미래로 전승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다. 해례본은 단지 과거의 유물이 아닌, 오늘날에도 유효한 민족의 지혜이며, 글로벌 시대 속에서 한국어의 위상을 드러내는 중요한 자산이다. 해례본을 통해 우리는 한글을 다시 바라보고, 그 안에 담긴 배려와 철학을 현재와 연결지을 수 있다. 그럴 때 비로소 한글은 단지 읽고 쓰는 수단을 넘어서, 한국인의 정체성과 문화력을 지켜내는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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