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하사창동 철불

우리가 박물관을 찾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전시는 무엇일까요? 유물, 유적, 조각상 등 다양한 것들이 떠오르지만, 어떤 하나가 사람의 시선을 압도할 만큼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닌다면 바로 그것이 주목할 가치가 있는 유물일 것입니다. 

오늘 소개할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조각실에서 가장 깊숙한 방에 자리한 거대한 철불입니다. 경기도 하남시 하사창동 절터에서 출토된 이 불상은 높이 2.81미터, 무게 6.2톤이라는 국내 최대의 철불로, 보는 이로 하여금 단숨에 숨을 멈추게 할 만큼의 위엄을 지니고 있습니다. 

단순히 불상의 조각미를 넘어서서, 이 철불은 고려시대의 역사, 기술, 정치, 종교 등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 더 깊은 이해를 요구합니다. 지금부터 이 철불의 조성과 역사, 의미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광주 하사창동 철불
광주 하사창동 철불



1. 고려시대 철불의 조형미와 위용


국내 최대의 철불이 주는 압도감

이 철불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닙니다. 지금도 1미터 높이의 대좌 위에 앉아 있어 실제 관람자에게는 4미터에 가까운 위용으로 다가옵니다. 강렬한 어깨선과 2미터가 넘는 무릎 간 너비, 그리고 짙은 철의 색감에서 오는 육중한 느낌은 보는 사람을 자연스레 고개 숙이게 합니다. 다른 밝고 자비로운 분위기의 불상과 달리, 이 철불은 무게감과 신비로움, 그리고 강력한 존재감을 지닌 초월적 형상으로 다가옵니다. 여기에 덧입혀졌을 황금빛 도금 흔적은 과거 이 철불이 얼마나 장엄하게 봉안되었는지를 상상하게 해줍니다.


철불의 조형적 특징과 석굴암의 유사성

불상의 자세는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린 항마촉지인으로, 석굴암 본존불과 비슷한 구도를 보여줍니다. 무릎 앞에 펼쳐진 부채꼴 주름, 한쪽 어깨를 드러낸 법의, 짙은 철재의 색감은 일반적인 석조나 금동 불상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줍니다. 얼굴 표정은 자비보다는 위엄과 무게를 드러내며, 보는 이로 하여금 신적인 존재와 마주한 듯한 감정을 자아냅니다. 이는 단순한 예술작품이 아니라 믿음과 권위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옛 황금빛의 흔적과 현재의 모습

이 철불은 지금은 짙은 갈색이지만, 원래는 황금빛으로 도금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무릎 부분에서는 금박을 입히기 전 처리였던 옻칠 흔적이 남아 있으며, 이는 당시에도 여래의 금빛 몸을 재현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실제 포천에서 출토된 또 다른 철불에서도 도금의 흔적이 발견되었기에, 고려 전기 철불 제작 시 이러한 방식이 보편적으로 적용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의 모습이든 과거 법당 안의 모습이든, 그 장엄함은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2. 광주 지역과 철불의 정치적 배경


고려 초 광주 지역의 중요성과 왕규의 흔적

이 철불이 발견된 하남 하사창동은 고려시대 광주로 불렸던 지역이며, 당시 유력한 호족 세력의 근거지였습니다. 학계에서는 태조 왕건의 16번째 비가 낳은 아들인 광주원군의 외조부, 왕규를 이 지역의 권력자로 주목합니다. 왕규는 태조에게 두 딸을 후비로 보낼 만큼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었고, 불상 제작 시기 또한 그 세력이 절정에 이르렀던 10세기 전반으로 추정됩니다. 이 철불은 그 권력의 상징이자 후원 흔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사창동 절터의 유적과 주변 사찰군

철불이 출토된 하사창동 절터는 이후 조사에서 천왕사라는 대규모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고, 주변 1km 내에 동사 절터와 직경 5.1m의 팔각대좌, 교산동 마애약사불좌상 등 다양한 불교유적이 밀집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절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전체가 불교문화의 중심지였다는 뜻이며, 철불도 이 문화권의 중심에 위치한 유물임을 보여줍니다. 즉, 이 지역 불사는 특정 가문이나 세력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을 만큼 대규모였습니다.


두 개의 철불, 그중 하나만 전해지는 이유

1917년 조선총독부의 고적 조사에 따르면, 철불은 동서로 2구가 존재했으며, 이 중 더 큰 하나가 현재 박물관에 있는 것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이후의 기록이 없어 사라졌거나 파손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사실 자체가 당시 불사의 규모와 철불의 비중을 말해주는 지표가 됩니다. 2구의 철불을 조성할 만큼의 자금과 기술력은 당시 세력가의 뒷받침 없이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3. 철이 불상 재료로 선택된 이유


철은 흔하지만 다루기 어려운 재료

철은 동에 비해 널리 퍼져 있었지만, 불상 제작 재료로는 까다로운 특성을 가졌습니다. 녹는점이 높아 주조가 어렵고, 식은 뒤엔 다듬기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표정, 옷주름 등의 세밀한 표현이 어려웠고, 이는 완성도에 영향을 줄 수 있었죠. 그러나 당시 불교계와 제작자들은 이 어려움을 극복하며 정교한 철불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는 기술력과 장인정신의 결합이라 볼 수 있습니다.


동 부족과 불교 탄압의 시대적 맥락

철이 불상 재료로 쓰이게 된 중요한 이유는 동의 부족이었습니다. 통일신라 말과 고려 초는 중국과의 교역이 원활하지 않았고, 내적으로도 사치 금지령이 반복되며 불교 사원과 귀족의 연합에 대한 견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애장왕, 흥덕왕 시기에는 사원 창건이 금지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철은 비교적 사회적 비난을 피해갈 수 있는 실용적인 대안이었어요.


철불 제작의 기술과 흔적

철불은 크기가 큰 경우가 많아 여러 조각을 나누어 주조한 뒤 이를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 가슴, 허리, 무릎 등 곳곳에 분할선이 남게 되었는데, 이 흔적은 오늘날에도 불상의 표면에서 확인됩니다. 당시 장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철을 다뤘는지 보여주는 귀중한 기술사적 단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옻칠, 도금 작업까지 진행되었기에 이 철불은 외형적으로도 매우 정제된 형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철불이 지닌 상징성과 영향력


종교적 믿음과 위엄의 구현

불상은 단순한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종교적 세계관과 미학, 정치 권력까지 반영된 상징체입니다. 특히 이처럼 대형 불상은 그 자체가 공간을 압도하며 보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 수 있지요. 광주 하사창동 철불은 신비함과 초월성을 모두 갖추며, 당시 사람들이 신에게 바친 최고의 예경이었을 것입니다. 실제 법당에 앉아 있었을 때 그 존재감은 지금보다도 더 강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민심 수습과 지역 안정의 상징

9세기 후반 경북 봉암사의 사례에서도 확인되듯, 사찰과 철불은 불안정한 사회 상황에서 민심을 다스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의 정치적 혼란과 도적들의 횡행 속에서, 대형 불상은 그 자체로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자 질서를 회복하는 상징물이 되었던 것이죠. 대중은 그 앞에서 공경심을 느끼고 공동체 속에서 안정을 찾았던 것입니다.


지방과 중앙 권력의 연결 고리

철불의 조성에는 지방 호족뿐 아니라 왕실의 후원이 있었던 경우도 많았습니다. 보림사, 실상사 등도 표면적으로는 지방 주도였지만, 실제로는 중앙과 연계된 사례가 밝혀지고 있지요. 이는 철불이 단지 지역 불사가 아니라,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정치적 의미를 가졌다는 점에서 주목됩니다. 광주 철불 역시 이러한 맥락 안에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철불이 전하는 과거의 무게, 현재의 울림


광주 하사창동 철불은 단순한 불교 조각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10세기 고려 초기의 정치, 경제, 종교, 기술 등 당대의 모든 문명 요소가 응축된 거대한 기념비이며, 시대의 흐름을 증명하는 유산입니다. 철이라는 재료를 택한 사회적 조건, 제작에 참여한 장인들의 기술력, 그리고 이를 후원한 지역 세력과 왕실의 정치적 배경은 모두 이 불상에 담겨 있습니다.

이 철불은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에서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대대적인 이사를 치르며 새 공간에 자리를 잡았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철로 만든 단단한 몸체는 천 년의 시간을 견뎠고, 그 존재감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광주 하사창동 철불은 그저 거대한 유물이 아니라, 시간의 두께를 머금은 신비로운 상징입니다. 그것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옛 조각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 사람들의 믿음과 정신, 그리고 그들이 남긴 문화적 유산을 함께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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