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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 백제의 왕과 왕비가 잠든 천년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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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덤'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으스스하고 무서운 느낌이 들기도 해요. 하지만 무덤은 단지 사람이 잠든 곳이 아니에요. 옛날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아주 소중한 장소랍니다.  특히 왕이나 왕비처럼 나라를 이끌었던 사람들이 잠든 무덤이라면 더더욱 중요하겠죠? 그 안에는 단순한 물건들뿐 아니라 그 시대의 생활 모습, 기술 수준, 다른 나라와의 관계까지 담겨 있거든요. 오늘 이야기할 무덤은 바로 백제의 무령왕과 왕비가 함께 묻힌 무령왕릉이에요. 이 무덤은 충청남도 공주시 송산리라는 곳에 있어요. 백제는 우리나라 삼국시대 중 하나로, 문화와 예술이 매우 발달했던 나라예요. 무령왕은 백제 제25대 왕이었고, 이 무덤은 무려 1500년 전의 것이에요.  1971년에 우연히 발견된 이 무덤은 도둑이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아서 당시 모습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백제의 문화와 생활을 아주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어요. 무령왕릉은 단순히 오래된 무덤이 아니라, 역사책에서도 다 알려주지 못한 옛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중요한 장소예요. 이 무덤 하나로 우리는 백제라는 나라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또 그 시대 사람들이 얼마나 지혜롭게 살았는지를 알 수 있어요. 이제 무령왕릉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볼까요?  무령왕릉 – 백제의 왕과 왕비가 잠든 천년의 비밀 2. 무덤은 어떻게 생겼을까? 벽돌로 만들어진 특별한 구조 무령왕릉은 다른 무덤과 조금 달라요. 보통은 돌로 만든 무덤이 많은데, 이 무덤은 벽돌을 사용해서 만들었어요. 무덤 안은 작은 방처럼 생겼고, 왕과 왕비가 함께 누울 수 있도록 두 자리가 있어요. 바닥과 벽, 천장까지 모두 벽돌로 만들어져 있어서 무너지지 않고 오랫동안 잘 남아 있을 수 있었답니다. 비가 와도 끄떡없는 튼튼한 설계 무덤 안에는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땅 아래에 물 빠지는 길도 만들었어요. 천장은 둥글게 만들어 흙의 무게를 잘 나눠 가질 수 있도록 했고, 입구는 두껍고 단단하게 ...

옥새 – 도장 하나에 담긴 왕의 힘과 나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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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도장을 자주 씁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도 하고, 학교에서 부모님의 도장을 가져오라는 숙제를 받은 적도 있죠. 그런데 아주 오래전에는 이 도장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나라의 큰 일을 결정하는 데 쓰였던 왕의 힘을 나타내는 상징 이었습니다. 이 도장을 우리는 ‘옥새’라고 부릅니다. 옥새는 조선 시대, 대한제국 시대의 국왕이나 황제가 나라를 대표하여 문서에 찍는 도장 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왕이 어떤 문서에 도장을 찍으면 그 문서가 진짜가 되는 것이죠. 오늘날에도 대통령이 중요한 문서에 도장을 찍는 모습이 뉴스에 나오곤 합니다. 지금은 '국새'라고 부르지만, 그 뿌리는 바로 옥새에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도장이 왜 중요했는지, 옥새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함께 알아보도록 할 거예요. 도장 하나가 우리나라 역사에 얼마나 큰 의미를 가졌는지 알게 된다면, 아마 더 흥미로울 거예요. 1. 옥새란 무엇일까? 옥으로 만든 아주 특별한 도장 ‘옥새’는 아주 귀한 돌인 옥으로 만든 특별한 도장 이에요. 예전에는 일반 사람이 도장을 가지는 것이 흔하지 않았어요. 도장은 주로 왕이나 귀족,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사용했어요. 그중에서도 왕이 직접 사용하는 도장이 바로 옥새였어요. 이 도장은 크기도 크고 모양도 아주 아름답게 만들어졌어요. 이름이 '옥'과 '새'로 이루어진 이유는, 옥이라는 재료와 도장을 뜻하는 말이 합쳐진 거예요. '새'는 도장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옥새는 **"옥으로 만든 왕의 도장"**을 뜻한답니다. 도장은 왜 왕에게 중요했을까? 도장이 중요한 이유는 왕의 명령이 진짜임을 보여주는 표시이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왕이 어떤 사람에게 땅을 나눠주기로 했다면, 그걸 말로만 하면 믿기 어려웠을 거예요. 하지만 왕의 도장이 찍혀 있다면, 그 문서가 진짜라는 증거 가 되니까 사람들이 믿을 수 있었죠. 또한, 외국에 보내는 ...

영은문 – 사대에서 자주로 바뀐 상징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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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구의 한복판, 독립문 앞에 조용히 놓여 있는 커다란 석재 하나가 있다. 언뜻 보기엔 독립문과 관련된 구조물 같지만, 사실 이 주춧돌은 조선시대 사대 외교의 상징물이었던 **영은문(迎恩門)**의 흔적이다.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지만, 이 조용한 돌 하나는 조선의 국제관계, 사대정신, 나아가 자주독립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역사 흐름을 품고 있다. 영은문은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문이었으며, 조선의 대외정책이 중국에 의존하던 시절의 현실을 반영한 구조물이다. 이 문을 통해 왕은 사신을 맞이하러 나갔고, 조선의 정체성은 외교적으로 형성되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시대의 흐름이 바뀌면서, 이 문은 결국 철거되고 그 자리에 자주 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 이 세워졌다. 이 글에서는 조선시대 외교 관계 속에 세워진 영은문의 역사와 기능, 이름의 변화, 그리고 철거 이후 독립문으로 대체되는 과정까지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영은문은 단순한 옛 문이 아니라, 사대에서 자주로 이어지는 역사의 전환점 을 상징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영은문 – 사대에서 자주로 바뀐 상징의 문 1. 모화관과 영은문의 역사적 배경 사대 외교의 현장, 모화관 조선은 건국 이후 중국과의 외교에서 사대를 핵심 원칙으로 삼았다. 특히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이 원칙은 더 강하게 작용했으며, 국왕이 직접 명나라 칙사를 맞이하는 전통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외교 활동이 이루어졌던 공간이 바로 **모화관(慕華館)**이었다. 서울 서대문 바깥에 위치한 이곳은 명나라 사신이 머무르던 곳이자, 조선 국왕이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나아가는 출발점이었다. 모화관은 1407년 태종 시기에 처음 건립되었고, 본래 이름은 모화루였으나 세종 때 모화관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의 왕이 명나라 사신에게 '은혜를 입는다'는 의미에서 모화(慕華)라는 이름이 붙었고, 이는 사대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조선은 명나라를 문명의 중심으로 여기며 그 질서를 따르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기 때문에...

한글의 설계도, 훈민정음 해례본의 위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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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은 단순한 책이 아니다. 이것은 문자 창제의 목적, 구조, 사용법을 모두 기록한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세종 28년(1446년), 백성을 위해 새로운 문자를 만든다는 숭고한 뜻에서 훈민정음이 반포되었고, 그 원리와 체계를 정리한 것이 바로 해례본이다. 간략한 서문인 ‘예의’와 학자들이 정리한 ‘해례’로 구성된 이 책은 한글이 단순한 문자 체계가 아닌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체계임을 보여준다. 해례본은 1940년 간송 전형필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며, 일제강점기 언어말살 정책에 대항하는 문화적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훈민정음은 단순히 문자를 만드는 기술적 작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백성을 향한 깊은 애정에서 비롯된 결정이자, 언어를 통해 사회적 평등을 이루고자 했던 지적·정치적 혁명이었다. 세종의 한글 창제는 단순한 개혁이 아닌, 조선이라는 나라의 문화적 독립 선언이었으며, 이는 이후 민족 정체성의 근간이 되었다.  해례본은 그 정신을 가장 명확하게 담고 있는 기록물이며, 오늘날 우리가 한글을 사용하는 일상 속에도 그 위대한 철학이 살아 숨 쉰다.    한글의 설계도, 훈민정음 해례본의 위대함 훈민정음 창제의 철학과 구조 백성을 위한 문자, 예의의 정신 훈민정음 서문에 담긴 핵심은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라는 대목이다. 이는 기존 한자로는 백성이 자기 말을 표현할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한 세종의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닌, 민족의 자존심이며 사고방식과 세계관의 표현이다. 세종은 민본주의 정신에 따라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문자 창제를 결심했고, 이는 문자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왕이 주도한 문자 창제’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인체를 닮은 자음과 모음의 원리 해례본에는 한글 자음과 모음의 창제 원리가 체계적으로 담겨 있다.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고, 모음은 하늘ㆍ땅ㆍ사람을 상징하는 철학적 원리에서 출발한다.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습을, ㅁ은 입을 ...

한민족의 노래, 세계의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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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은 한국인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민요이자 정체성의 상징이다. 특정 작곡가나 작사자가 만든 노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대를 거쳐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어온 아리랑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감성을 품고 있다. 강원도 정선, 전라남도 진도, 경상남도 밀양 등지에는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아리랑이 지금까지도 생생히 전해져 온다.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이 노래는 단순한 민요를 넘어, 고난과 슬픔, 기쁨과 희망을 함께 나눈 한민족 공동체의 집단 기억이자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아리랑의 기원과 시대를 아우른 기록들 왕도 즐겨 듣던 서민의 노래 아리랑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에도 이미 널리 불렸던 기록이 전한다.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고종이 밤마다 배우를 불러 아리랑타령을 즐겨 들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는 아리랑이 이미 궁중과 민간에서 폭넓게 향유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다. 당시에도 다양한 아리랑이 존재했으며, 그 우열을 논할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는 점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온 대중성과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해외에서 기록된 한국의 민요 1896년,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는 잡지 『Korea Repository』에 아리랑을 영문 가사와 서양음계로 채보하여 소개하였다. 그는 아리랑을 "조선인에게 쌀과 같다"고 표현하며, 한국인이 언제 어디서나 부를 수 있는 노래로 소개했다. 이는 아리랑이 단순한 유행가가 아닌, 시대와 세대를 넘어 삶과 함께하는 민요였음을 세계에 알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부터 아리랑은 한국인의 정체성과 결합된 노래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영화와 함께한 민족의 아픔과 희망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1926년 나운규가 제작한 영화 <아리랑>은 민족의 정서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주제곡으로 삽입된 아리랑은 전국적으로 퍼지며 대중화되었다. 영화는 식민지 조선의 고단한 현실과 민중의 분노, 애환을 담고 있었고, 그 속에서 울려 퍼진 아리랑은 ...

고인돌 유적,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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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선사시대부터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품어온 땅이다. 그중에서도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고인돌은 우리 민족의 독창적인 거석문화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고인돌은 단순한 무덤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선사시대 사람들의 사회 구조, 기술 수준,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전 세계 고인돌의 40% 이상이 한반도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고인돌의 세계사적 중요성을 입증한다. 이러한 문화유산의 가치를 인정받아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지금도 교육적·학술적·관광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고인돌 유적,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 고인돌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석재 채석과 운반의 정교한 기술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고된 작업이었다. 수십 톤의 덮개돌을 산에서 떼어내는 채석 기술부터 시작해, 둥근 통나무와 밧줄을 이용해 옮기는 운반 기술, 땅을 파고 고임돌을 세운 뒤 덮개돌을 올리는 방식은 고도의 협업과 기술을 요구했다. 실험고고학에 따르면 32톤의 돌을 옮기려면 약 200명의 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작업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조직력, 기술력, 신념이 어우러진 집단 활동이었다. 고인돌의 다양한 형태 우리나라 고인돌은 덮개돌의 형태와 고임 방식에 따라 크게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위석식으로 구분된다. 탁자식 고인돌은 무덤방이 지상에 노출되고, 크고 세련된 조형미를 자랑한다. 바둑판식 고인돌은 땅 아래에 무덤방을 만들고, 비교적 간결한 형태다. 개석식은 고임돌 없이 덮개돌만 얹은 것이고, 위석식은 제주도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한 형태다. 각 형태는 지역별, 계층별 특성을 반영하며 당시의 사회 구조와 기술 수준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고인돌 유적이 밀집된 세 지역 전북 고창 고인돌: 바둑판식의 본거지 전라북도 고창 지역은 바둑판식 고인돌이 밀집된 대표적인 곳이다. 특히 죽림리와 상갑리 일대에는 1.8km에 걸쳐 447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어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조선시대 화기의 상징, 총통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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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활과 창 같은 전통 무기 외에도 화약을 이용한 화포 무기가 적극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총통'은 조선의 무기 기술을 대표하는 중요한 유통식 화기였습니다. 총통은 단순히 적을 공격하는 도구를 넘어, 조선의 과학 기술과 군사 전략, 그리고 금속 주조 기술의 집약체였습니다. 지금은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는 유물이지만, 당시에는 실제 전쟁터에서 사용된 실전 무기였습니다. 왕조의 안보를 책임졌던 이 무기에는 조선의 위기 대응력과 기술 수준이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조선은 특히 15세기 세종대왕 때부터 화약 무기 개발에 힘을 쏟았으며, 화포의 체계적인 분류와 명칭 정립도 이 시기에 이뤄졌습니다. 그 결과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등 다양한 크기와 용도의 총통이 제작되었습니다. 이는 단지 군사 기술의 발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이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얼마나 전략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글에서는 총통의 구조와 특징, 제작 방식, 실전 활용 등을 중심으로 총통의 역사적 의미를 쉽고 자세히 풀어보겠습니다. 조선시대 화기의 상징, 총통 이야기 1. 총통이란 무엇인가? 조선시대 유통식 화기의 특징 총통은 유통식, 즉 안에 화약을 넣는 통이 있는 구조의 무기로, 지금으로 치면 대포나 화승총과 유사한 기능을 가졌습니다. 조선시대 군대에서 적의 진격을 막거나 성을 방어할 때 사용되었으며, 청동으로 제작되어 단단하고 무거웠습니다. 발사 원리는 단순합니다. 약실에 화약을 넣고 불씨를 점화하여 그 폭발력으로 쇠구슬이나 불화살을 날리는 방식입니다. 이와 같은 구조는 당시로선 혁신적인 기술이었으며, 화력 무기 도입의 초창기 형태로 평가받습니다. 총통의 기본 구조 총통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통신'이라 불리는 긴 관으로, 탄환이 지나가는 길입니다. 이 관은 안쪽이 매끈하게 뚫려 있어 탄환이 잘 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둘째는 '약실'입니다. 화약을 넣는 공간으로, 폭발력을 견...

조선 시대의 교통수단, 가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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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자동차와 전철, 비행기처럼 빠르고 편리한 교통수단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사람이나 물건을 옮길 수단이 매우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바퀴 달린 수레가 있긴 했지만, 험한 지형에서는 오히려 사람이 들고 다니는 방식이 더 효율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가마'입니다.  가마는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작은 집처럼 생긴 구조물로, 앞뒤에서 사람이 들거나 멜빵으로 메고 이동시켰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사용하는 가마의 종류가 정해져 있었고, 궁중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다양한 가마의 종류와 쓰임, 구조, 문화적 의미 등을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조선 시대의 교통수단, 가마 이야기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1910년대 가마를 타고 외출하는 귀부인_채색엽서_조선풍속 , CC BY 1. 가마란 무엇인가요? 가마의 기본 구조와 작동 방식 가마는 작고 닫힌 방처럼 생긴 구조물입니다. 안에는 한 사람이 들어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바닥 아래에는 '가마채'라고 불리는 긴 막대기 두 개가 앞뒤로 달려 있습니다. 이 막대기를 두 사람 혹은 네 사람이 양쪽에서 어깨에 메고 이동하는 방식입니다. 간단한 것 같지만, 균형을 맞추는 일이 쉽지 않았으며, 가마꾼들의 숙련도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안에 탄 사람은 창을 통해 밖을 볼 수도 있고, 천으로 된 주렴이나 문을 닫고 안쪽을 가릴 수도 있었습니다. 가마의 역할과 필요성 가마는 단순한 이동수단 그 이상이었습니다. 왕족이나 귀족들이 먼 거리를 편히 이동하기 위한 도구였고, 신분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길이 울퉁불퉁하고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 사회에서, 가마는 고위층이 이동할 때 피로를 덜 수 있는 수단이었습니다. 또한 혼례, 장례, 궁중 행사 등 중요한 의례에서도 가마는 핵심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현대의 리무진이나 국빈 전용차처럼, 위엄과 격식을 갖춘 교통수단이었던 것입니다. 2. 왕과 공주가 ...

하늘을 담은 조선의 과학기계, 혼천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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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들은 밤하늘을 자주 바라보았습니다. 별이 왜 반짝이는지, 해는 왜 뜨고 지는지, 달의 모양은 왜 바뀌는지를 궁금해했습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나 달력, 시계가 없던 시절에는 하늘을 잘 관찰해야 계절을 파악하고 농사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늘의 움직임을 좀 더 정확하게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해와 달, 별의 위치를 측정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조선 시대의 과학기계, ‘혼천의’입니다. 혼천의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구 위에서 관찰할 수 있도록 만든 도구입니다. 별자리의 위치나 해, 달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고, 계절과 시간의 흐름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혼천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닌, 하늘을 향한 사람들의 궁금증과 관찰력, 그리고 과학의 힘이 담긴 기계였습니다. 하늘을 담은 조선의 과학기계, 혼천의 이야기 혼천의는 어떤 기계입니까? 혼천의는 둥근 고리들이 겹겹이 이어져 있는 모양의 기계입니다. 이 고리들은 해가 움직이는 길, 달이 떠오르고 지는 길, 별자리가 따라가는 길을 나타냅니다. 이 고리들이 서로 연결되어 돌아가기 때문에, 마치 하늘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기계는 조선 세종대왕 시절, 장영실이라는 과학자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정확한 시간을 알고 계절을 파악하여 삶에 도움이 되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천문학자들과 과학자들에게 혼천의 제작을 명령했습니다. 그 결과로 정초, 정인지 같은 학자들이 문헌을 조사하고, 이천과 장영실이 실제 제작을 담당하여 혼천의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혼천의는 계속 발전했습니다. 효종 시대에는 최유지, 현종 시대에는 송이영이라는 과학자가 혼천의를 새롭게 제작하거나 개량했습니다. 특히 송이영이 만든 혼천의는 서양 시계의 원리를 반영하여, 무게추를 이용한 자동 회전 기능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혼천의는 어떤 구조로 되어 있습니까? 첫째, 방향을 알려주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육합의’라고 하며, 동, 서, 남, 북의 방향뿐 아니라 ...

정리자 – 정조의 활자 혁신이 담긴 금속 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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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활자와 인쇄에 깊은 관심을 가진 왕이 있었습니다. 바로 정조입니다. 정조는 단지 책을 인쇄하기 위해 활자를 만든 것이 아니라, 활자를 통해 왕실의 위엄과 조선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가 특별히 제작한 활자가 바로 ‘정리자(整理字)’입니다. 정리자는 1795년부터 주조를 시작해 1796년에 완성된 활자로, 대자 16만 자와 소자 14만 자 등 무려 30만 자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이 활자는 단지 인쇄용 도구를 넘어 조선 후기 문화유산의 상징이며, 정조의 정치적·문화적 비전을 담은 역사적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정조가 기획하고 제작한 정리자의 역사적 의의, 구조적 특징, 그리고 활자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조선의 문화적 깊이를 살펴보겠습니다. 정리자 – 정조의 활자 혁신이 담긴 금속 활자 정리자, 정리의궤를 위해 만들어진 활자 정리의 의미와 정리소의 설립 ‘정리’는 조선시대에 국왕이 행차할 때, 머물 장소를 새롭게 정비하고 수리하는 일을 말합니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1795년 화성으로 대대적인 원행을 떠났고, 이를 준비하기 위해 ‘정리소’를 설치했습니다. 정리소는 단순한 준비 조직이 아니라, 교통, 예산, 물자, 회계 등 모든 실무를 담당하는 종합 행정 기구였습니다. 정조는 이 원행이 백성들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국가 재정을 사용하지 않고 환곡 이자 수입으로 비용을 충당하였으며, 남은 금액은 ‘정리곡’으로 돌려주는 세심한 정치를 펼쳤습니다. 원행의궤 인쇄를 위한 정리자 주조 원행 후, 정조는 이 행사의 모든 과정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를 간행합니다. 이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활자가 ‘정리자’입니다. 기존의 의궤는 대부분 필사본이었으나, 정리자를 사용한 의궤는 처음으로 금속활자로 인쇄된 의궤였고, 그만큼 널리 보급되기를 원한 정조의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활자의 제작은 단순한 기록 차원을 넘어, 왕실의 권위와 정조의 문예 진흥 정책을 널리 알...

대가야 무덤에서 출토된 판갑옷과 투구 –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갑옷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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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아주 오래전, 약 1500년 전의 대가야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에는 강하고 용감한 무사들이 있었어요. 이 무사들은 전쟁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한 갑옷과 투구를 썼답니다. 1978년, 고령 지산동이라는 곳에서 아주 특별한 무덤이 발견되었어요.  그곳에서 오래된 갑옷과 투구가 흙 속에 잠들어 있었지요. 이 갑옷은 단순히 철 조각이 아니라, 그 당시 무사들의 기술과 문화, 용기를 보여주는 소중한 유산이랍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공부하면, 옛날 무사들의 삶과 생각, 그리고 가야라는 나라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어요. 지금부터 그 갑옷에 대해 쉽게, 하나씩 알아볼게요. 대가야 무덤에서 출토된 판갑옷과 투구 –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갑옷 이야기 1. 가야 사람들이 만든 철 갑옷 철판으로 만든 특별한 갑옷 가야 사람들은 튼튼한 철을 이용해 갑옷을 만들었어요. 처음에는 가죽이나 나무로 갑옷을 만들었지만, 시간이 지나 철로 바뀌었답니다. 특히 ‘판갑옷’이라는 갑옷은 큰 철판 여러 개를 연결해서 만들었어요. 갑옷은 앞뒤 몸통과 어깨를 덮는 부분으로 나뉘는데, 몸을 잘 보호해주는 구조였지요. 무게는 무거웠지만 튼튼했고, 적의 무기를 막아주었답니다. 가야 무사들은 이 갑옷을 입고 용감하게 싸웠어요. 움직임보다 방어력이 중요했어요 판갑옷은 비늘처럼 작은 조각을 연결한 갑옷보다 움직이기 어렵지만, 훨씬 튼튼했어요. 그래서 보병, 즉 말을 타지 않고 걸어 다니는 무사들이 주로 입었어요. 비늘갑옷은 가볍고 움직이기 좋아서 말을 타는 무사에게 좋았고요. 각각의 장점이 있었지만, 가야 무사들은 판갑옷을 입고 싸우는 걸 자랑스럽게 여겼답니다. 전쟁터에서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으니까요. 2. 투구와 어깨 보호 장비 머리를 지켜주는 투구 고령 지산동 무덤에서 나온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철모예요. 살구씨처럼 생긴 모양이 아주 특이하지요? 이 투구는 8개의 철판을 이어서 만들었는데, 위쪽에는 머리를 덮고, 아래쪽에는 목을 감싸는 부분이 있...

홍무 30년 청곡사명 청동은입사향완 – 조선시대 불교 공예의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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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문화를 계승하고 조선의 기틀을 세우던 시기, 한 점의 공예품이 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불을 담는 향로가 아니라, 새로운 왕조의 정신을 담은 상징이었습니다. 바로 ‘홍무 30년 청곡사명 청동은입사향완’입니다.  이 향완은 조선 초기, 정확히는 1397년에 제작된 것으로, 조선시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청동은입사향완입니다. 높이 39cm의 이 향완은 통일신라와 고려의 불교 조각 전통을 잇고 있으며, 특히 은입사 기법과 범자의 표현에서 예술성과 종교적 상징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되었다는 명문은 이 향완의 역사적 무게를 더합니다. 본 글에서는 이 유물의 기형과 장식, 시대적 배경과 정치적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려 합니다. 홍무 30년 청곡사명 청동은입사향완 – 조선시대 불교 공예의 정수 1. 청동은입사향완의 구조와 조형미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향완의 형태 이 향완은 받침, 간주, 노신의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받침은 3단이며, 상단에는 연화당초문, 중단에는 뇌문, 하단에는 무문 외반부가 위치합니다. 간주는 나팔형으로, 하단엔 연판문, 상단엔 여의두문을 은입사로 표현하였고, 노신 아래 2단의 원륭대는 각각 뇌문과 연판문으로 장식되었습니다. 전체 구조는 안정적이면서도 화려한 문양을 품고 있어 시각적으로도 조화롭습니다. 정교한 문양과 은입사의 조화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은입사 기법입니다. 유운문, 앙련의 연판문대, 연화당초문이 정교하게 새겨졌으며, 이는 단지 장식을 위한 요소가 아니라, 불교의 세계관과 미적 가치를 함께 담아내고자 한 결과입니다. 문양 하나하나에 담긴 상징성은 당시 장인의 수준 높은 기술과 더불어 불교 신앙의 깊이를 엿보게 합니다. 범자의 상징성과 독창성 이 향완의 핵심은 범자입니다. 중심에 여의두문을 배치하고, 그 안에 다시 원을 그려 ‘aṃ, hmaṃ, dme, ya, tgi, ma’라는 여섯 글자의 범자를 정밀하게 은입사했습니다. 조선시대 향완 중 이렇게 여섯 자의 범자를 새긴 예...

세종대왕과 하늘의 과학, 조선 최초의 역법 ‘칠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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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달력을 통해 하루하루를 기록하고 계획합니다. 그런데 이 달력이라는 것이 단지 날짜만 알려주는 도구는 아닙니다. 과거에는 한 나라의 정치, 과학,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핵심적인 장치였지요. 특히 조선 세종대왕 시대에 만들어진 **‘칠정산’**은 단순한 달력 제작을 넘어선 위대한 과학적 업적이자 조선의 자주성과 실용정신의 결정체 였어요. ‘칠정산’은 해, 달, 다섯 행성의 움직임을 계산하여 날짜와 절기를 정하고, 심지어 일식과 월식까지 예측할 수 있도록 만든 과학서입니다. 세종대왕은 이 책을 통해 조선만의 역법을 만들고자 했고, 이는 당시 중국에 의존하던 시간 체계를 스스로 바로잡은 의미 있는 도전이었어요. 이제 이 글에서는 칠정산이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졌고,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깊이 있게 살펴보려 합니다. 세종대왕과 하늘의 과학, 조선 최초의 역법 ‘칠정산’ 1. ‘칠정산’은 어떤 책일까? 해와 달, 다섯 행성의 움직임을 계산한 과학서 칠정산이라는 이름은 익숙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면 어렵지 않아요. ‘칠정’은 해,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일곱 천체를 말하고, ‘산’은 계산을 뜻합니다. 즉, 하늘의 일곱 별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계산한 책 이 바로 칠정산이에요. 이러한 천체의 움직임은 계절, 절기, 일출과 일몰 시각까지 모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정확한 시간 계산에는 반드시 필요했죠. 당시에는 맨눈으로 하늘을 관찰하고 계산을 반복하며 만들어야 했기에 과학자들의 노력과 정성이 엄청났답니다. 날짜와 절기를 정하는 내편 칠정산은 두 권으로 나뉘는데, 그중 **내편(內篇)**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의 뼈대와 같아요. 해가 뜨고 지는 시각, 음력과 양력 날짜, 24절기를 모두 계산해서 정리했지요. 이때 기준으로 삼은 장소는 바로 조선의 수도 ‘한양(서울)’이었습니다. 즉, 조선 사람들의 삶에 맞는 정확한 날짜를 알려주기 위한 계산이었던 것이에요. 당시 기준으로, 북경보다 한양의 동짓...

광주 하사창동 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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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박물관을 찾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전시는 무엇일까요? 유물, 유적, 조각상 등 다양한 것들이 떠오르지만, 어떤 하나가 사람의 시선을 압도할 만큼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닌다면 바로 그것이 주목할 가치가 있는 유물일 것입니다.  오늘 소개할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조각실에서 가장 깊숙한 방에 자리한 거대한 철불입니다. 경기도 하남시 하사창동 절터에서 출토된 이 불상은 높이 2.81미터, 무게 6.2톤이라는 국내 최대의 철불로, 보는 이로 하여금 단숨에 숨을 멈추게 할 만큼의 위엄을 지니고 있습니다.  단순히 불상의 조각미를 넘어서서, 이 철불은 고려시대의 역사, 기술, 정치, 종교 등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 더 깊은 이해를 요구합니다. 지금부터 이 철불의 조성과 역사, 의미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광주 하사창동 철불 1. 고려시대 철불의 조형미와 위용 국내 최대의 철불이 주는 압도감 이 철불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닙니다. 지금도 1미터 높이의 대좌 위에 앉아 있어 실제 관람자에게는 4미터에 가까운 위용으로 다가옵니다. 강렬한 어깨선과 2미터가 넘는 무릎 간 너비, 그리고 짙은 철의 색감에서 오는 육중한 느낌은 보는 사람을 자연스레 고개 숙이게 합니다. 다른 밝고 자비로운 분위기의 불상과 달리, 이 철불은 무게감과 신비로움, 그리고 강력한 존재감을 지닌 초월적 형상으로 다가옵니다. 여기에 덧입혀졌을 황금빛 도금 흔적은 과거 이 철불이 얼마나 장엄하게 봉안되었는지를 상상하게 해줍니다. 철불의 조형적 특징과 석굴암의 유사성 불상의 자세는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린 항마촉지인으로, 석굴암 본존불과 비슷한 구도를 보여줍니다. 무릎 앞에 펼쳐진 부채꼴 주름, 한쪽 어깨를 드러낸 법의, 짙은 철재의 색감은 일반적인 석조나 금동 불상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줍니다. 얼굴 표정은 자비보다는 위엄과 무게를 드러내며, 보는 이로 하여금 신적인 존재와 마주한 듯한 감정을 자아냅니다. 이는 단순한 예술작품이 아니라 믿음과 권위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는 중요한 ...

조선시대 하늘을 읽던 장소, 광화방 관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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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보면 미래를 알 수 있을까?” 조선 시대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어요. 하늘의 별과 해, 달의 움직임을 보면서 땅에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예측하고자 했죠. 그 중심에는 바로 ‘관천대’라는 곳이 있었어요. ‘관천대’는 하늘을 관찰하기 위한 높은 대(臺)로, 오늘날로 치면 천문대와 비슷해요.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 한양, 지금의 서울 종로에 있던 ‘광화방 관천대’는 조선 왕들이 직접 하늘을 살피게 했던 아주 특별한 장소였어요. 관천대는 신라 시대 경주의 ‘첨성대’와 함께 비교되는 천문대 유적으로, 조선 시대 과학과 정치가 만나는 상징적인 장소였어요. 관상감이라는 국가 천문 기관이 이곳에서 하늘을 살피고, 천문 현상을 기록하며, 나라의 길흉화복을 예측했어요. 이번 글에서는 조선의 하늘을 지켜보던 광화방 관천대와 그 위에 올려졌던 특별한 과학 기구 ‘소간의’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게요. 조선시대 하늘을 읽던 장소, 광화방 관천대 이야기 관천대는 어떤 곳이었을까? 조선의 천문대, 광화방 관천대 조선은 나라를 세운 뒤 한양의 북쪽 지역인 광화방에 '서운관'이라는 천문 기관을 만들었어요. 그 안에 천체를 관찰할 수 있는 높은 돌 구조물, 즉 관천대를 쌓았죠. 지금은 ‘관상감 관천대’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296호로 지정되어 있고, 종로구 원서동에 위치한 현대건설 사옥 안에 남아 있어요. 이 관천대는 9단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고, 그 위에 ‘소간의’라는 천문 관측 장비를 올려놓았기 때문에 ‘소간의대’라고도 불렸어요. 관천대는 별을 보는 장소, 즉 ‘첨성대’의 기능을 했기 때문에 ‘조선의 첨성대’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중요한 곳이었답니다. 하늘을 통해 정치를 바로잡다 조선에서는 천문 현상을 단순히 과학으로 보지 않았어요. 별의 움직임이나 혜성의 출현 같은 하늘의 변화는 나라에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생긴다는 신호로 여겼죠. 임금은 하늘의 움직임을 보며 정치를 반성하고, 백성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한 결정을 내렸어요. 그래서 하늘을 관찰하는 일은 단지 과학이...

측우기, 조선이 만든 세계 최초의 비 측정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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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는 날, 우리는 우산을 챙기고 날씨 앱을 확인해요. 그런데 아주 오래 전 조선 시대에는 비가 얼마나 왔는지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바로 ‘측우기’라는 특별한 도구를 만들었어요. 측우기는 비가 얼마나 왔는지를 숫자로 정확히 재는 기계였어요. 놀랍게도 이 도구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조선에서 만들었답니다. 특히 세종대왕 시대에 만들어졌고, 이 도구를 사용해서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도록 도왔어요. 이번 글에서는 측우기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왜 중요했는지, 또 나중에는 어떻게 다시 복원되었는지를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알기 쉽게 알려줄게요. 측우기, 조선이 만든 세계 최초의 비 측정 도구 측우기의 탄생 – 비를 숫자로 재기 시작했어요 세종대왕의 아들, 세자가 실험을 했어요 조선 시대에는 비가 얼마나 왔는지를 눈으로 보고 땅이 얼마나 젖었는지 살펴보는 식으로 확인했어요. 그런데 이 방법은 정확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세종대왕의 아들이었던 세자가 구리 그릇을 만들어서 직접 비를 받아보는 실험을 했어요. 그걸 계기로 ‘측우기’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세종대왕은 서운관이라는 천문 기구를 만드는 기관에 명령해서, 높이 2척, 지름 8촌인 쇠그릇을 만들게 했어요. 이 그릇은 돌로 만든 받침대 위에 올려두고, 비가 오면 빗물을 받아서 자로 깊이를 재는 방식이었어요. 숫자로 비의 양을 재는 시대가 열렸어요 측우기는 비가 얼마나 왔는지를 '척, 촌, 분'이라는 단위로 재었어요. 이것은 지금의 센티미터처럼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예요. 조선 전역에 측우기를 설치해서 각 지역에서 비가 얼마나 왔는지를 기록하고, 임금에게 보고하게 했어요. 이 덕분에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들거나,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홍수가 날 때, 나라에서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어요. 비를 기다리며, 임금님도 기도했어요 정조 임금님의 기우제와 측우기 조선의 정조 임금님은 비가 오지 않아 백성들이 힘들어할 때, 직접 기우제를 지냈어요. 기우제는 하늘에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는 행사예요. 정조는 남산에...

조선의 표준 자, 경신척 – 백성을 위한 과학의 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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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상에서 자로 길이를 재고, 저울로 무게를 달며, 컵으로 물을 잽니다. 이처럼 정확한 기준이 있어야 옷을 만들거나 집을 지을 때 실수가 없겠지요. 그런데 만약 누군가는 짧은 자를 쓰고, 다른 사람은 긴 자를 쓴다면 공정한 거래는 어려울 거예요. 그래서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모두가 똑같이 사용할 수 있는 정확한 '기준'을 만들려고 했어요. 조선 시대의 영조 임금은 1740년에 '경신척'이라는 자를 만들었어요. 이 자는 단순히 길이를 재는 도구가 아니라, 전국 어디서나 똑같이 사용하는 길이의 기준 이었지요. 경신척을 만든 사람은 최천약이라는 훌륭한 기술자였고, 그는 조선에서 아주 유명한 장인이었답니다. 이 경신척은 지금도 국립고궁박물관 에 전시되어 있어요. 28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이 자를 통해 우리는 조선의 과학과, 백성을 생각한 임금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요. 조선의 표준 자, 경신척 – 백성을 위한 과학의 자국 세종과 영조, 기준을 세우다 세종대왕: 다섯 개의 자를 만들다 조선의 세종대왕은 백성의 삶을 더 편리하게 만들기 위해 다섯 가지 기준 자를 만들었어요. 자마다 쓰임이 달랐답니다. 황종척 : 악기를 만들 때 사용했어요. 음을 맞추기 위해 꼭 필요했어요. 주척 : 하늘을 관측하거나 제사를 준비할 때 사용했어요. 영조척 : 건물을 지을 때 사용했어요. 예기척 : 왕실에서 사용하는 그릇이나 제사 도구를 만들 때 사용했어요. 포백척 : 옷을 만들거나, 땅을 재는 데 썼어요. 세종대왕은 이 자들을 실제로 만들어 보고, 나라 곳곳에 보냈어요. 그래서 백성들이 똑같은 기준으로 물건을 만들거나 세금을 계산할 수 있었죠. 영조 임금: 경신척을 만들다 세종 때 만든 자들이 오래되어 낡고 없어지자, 영조 임금은 자를 새로 만들기로 해요. 바로 '경신척'이에요. 당시 높은 벼슬을 한 유척기가 “세종이 만든 자가 삼척에 있다”고 알려주자, 영조는 기술자인 최천약에게 새 자를 만들라고 해요. 이 자는 단순히 하나...

조선의 해시계 앙부일구, 세종이 만든 시간을 나누는 과학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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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시계를 보며 하루를 계획하는 건 지금은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예전에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기 어려웠어요. 특히 조선 시대 백성들에게는 낮 시간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어요. 밤에는 물시계가 있었지만, 해가 떠 있을 때는 대충 짐작으로 시간을 알아야 했지요. 그래서 세종대왕은 낮 시간도 정확히 알 수 있도록 '앙부일귀'라는 해시계를 만들었어요. 앙부일귀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솥'이란 뜻인데, 그 모양이 진짜 솥처럼 생겼어요. 이 시계는 길가나 시장에 설치되어 백성들도 쉽게 볼 수 있었고, 누구나 해 그림자를 보고 시간을 알 수 있었지요. 과학을 특별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두가 사용할 수 있도록 했던 세종의 생각이 담긴 훌륭한 발명이었어요. 조선의 해시계 앙부일귀, 세종이 만든 시간을 나누는 과학 유산 조선, 시간을 재기 시작하다 앙부일귀는 왜 만들었을까? 세종대왕은 1434년에 '낮 시간도 모두가 알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해시계를 만들게 했어요. 밤에는 자격루 같은 물시계가 있어서 시각을 알 수 있었지만, 해가 떠 있는 시간에는 기준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백성들도 쉽게 볼 수 있는 해시계를 거리에 설치했어요. 앙부일귀는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해시계였어요. 반구 모양의 시계판 안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바늘(영침)을 꽂고, 해의 그림자가 가리키는 선을 따라 시간을 알 수 있었어요. 이 시계는 궁궐뿐 아니라 시장이나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도 놓였어요. 글 모르는 사람도 쉽게 알 수 있었어요 세종대왕은 앙부일귀에 시간 눈금과 함께 열두 동물(12지신) 그림도 새겼어요. 그래서 글자를 모르는 사람도 어느 동물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닿는지를 보고 시간을 알 수 있었지요. 예를 들어 '토끼' 그림에 그림자가 닿으면 지금은 토끼 시각이라는 뜻이에요. 이처럼 앙부일귀는 누구나 시간을 알 수 있도록 만든 공공 해시계였어요. 세종대왕은 과학이 특별한 사람들만 쓰는 것이 아니라, 백성 모두에게 필요한 ...

수표석: 조선이 물을 다스린 과학, 세종의 수위 측정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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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뉴스가 있다. 바로 한강 교각의 수위가 몇 미터를 넘었다는 보도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교각의 눈금은 사실상 홍수 경보의 기준선이자 재난 대응을 위한 중요한 과학적 지표다. 놀랍게도 이러한 수위 측정 방식은 600년 전 조선시대부터 이미 사용되어 왔다. 조선은 세종대왕 시대에 이미 물의 높이를 기록하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세종은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를 만든 동시에, 비가 내린 후 하천의 유량을 측정할 수 있는 수표를 세웠다. 수표는 단순히 돌에 눈금을 새긴 구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관료들이 수위를 측정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며, 실록에 기록까지 남기는 국가적인 과학 행정의 산물이자 홍수 대비 전략이었다. 특히 청계천과 한강에 설치된 수표는 지금도 일부가 남아 있어, 조선의 과학과 행정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조선의 수표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등장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세종부터 영조 시대까지 따라가 본다. 수표석: 조선이 물을 다스린 과학, 세종의 수위 측정 시스템 세종대왕, 수표를 세우다 기후 재해에 대응하기 위한 과학의 출발 조선은 여름 장마철에 집중되는 폭우로 인해 자주 홍수를 겪었다. 태종 4년에는 개성에 내린 폭우로 인해 성벽이 무너지고 수십 명이 익사하는 큰 피해가 발생했으며, 한양에서도 청계천 주변이 자주 범람해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했다. 이에 세종은 하늘의 비를 측정하는 측우기와 함께, 강과 하천의 수위를 측정하는 수표 설치를 명령했다. 수표는 정사각형 돌 위에 두 개의 부석을 세우고 그 사이에 나무기둥을 박아 눈금을 새기는 방식이었다. 척, 촌, 분 단위로 물 높이를 표시했고, 담당 관료가 이를 측정해 중앙관청에 보고하게 했다. 측량 결과는 ‘수표단자’라는 명칭으로 카드에 기록되었고, 이 자료는 후일 실록을 편찬할 때 참고자료로 활용되었다. 과학적 수치를 국가 정책에 반영하는 체계가 이미 세종 때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청계...